고려시대 인물 키워드로 정리하는 시대별

고려시대 개구리의 리더십인 광종 태조가 건국 과정에서 각 지방 호족의 딸들과 정략결혼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태조 사후 고려는 호족들 간의 치열한 왕위 계승전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중 두 형이 요절한 탓에 왕좌에서 멀었던 태조의 셋째 아들이 고려 제4대 왕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지방의 호족중심이었던 고려를 강력한 왕권국가로 만들고 정치 경제 개혁으로 500년간 고려의 초석을 다진 광종입니다.

서희의강동6주,한국외교사상가장극적인협상은거란의80만대군과대결하여한번의싸움없이압록강동쪽으로강동6주를되찾은고려영웅서희의훌륭한담판이었습니다.

최충헌과 교정도감 최충헌은 권력을 잡으면서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중국이 그동안 최고의 권력기구였으나 교정도감이 대신하여 국가의 여러 가지 중요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반대세력을 누르고 멋대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던 그는 경제적으로 넓은 영토를, 군사적으로도 도방과 삼별초를 군사처럼 거느렸습니다.

농민의 땅을 함부로 빼앗고, 문벌귀족들의 땅을 차지하여 자신들의 농장으로 만들고, 이렇게 백성들을 거세게 빼앗아 무신정변 이전보다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농민과 천민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민중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요동정벌군제 개혁안이야말로 정도전이 부르짖던 요동정벌을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정도전의 요동정벌 의지는 확고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379년(태조 6년) 정도전은 측근인 남남과 결탁하여 태조왕에게 결연히 뜻을 밝혔습니다.

이방원의 참모가 된 ‘고려 충신’ 하륜하륜은 정도전과 같은 팔방미인 스타일, 즉 르네상스형 참모였습니다.

정통학자로 볼 때 그들은 쓸데없는 학문까지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문학, 역사, 철학 외에도 도시공학, 군사학, 법률 등에도 관심이 있었고, 하륜은 문, 사, 철 이외에도 관상학, 풍수학 등에도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고려시대의 전시과제도 고려시대의 전시과라고 하는 토지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어 관리들에게 토지를 지급할 수 없게 되자 일시적으로 관리의 생계를 위해 녹과전을 지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미봉책으로 관료들이 권력을 잡은 토지를 독점적으로 폐해를 막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 재정은 날로 고갈되고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충신인 정몽주 선생은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왔을 당시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소화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지만 명나라와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외교인이기도 합니다.

친명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시해된 후 친원파가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자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으로 양국의 신뢰를 회복하자”고 주장하여 전란의 위기를 해소하였습니다.

한국의 지도를 바꾼 간척지 농경을 위한 간척의 시작은 고려 고종 35년(1248년) 몽고병란 때 식량 조달을 위해 청천강 하구에 제방을 축조한 것이 처음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강화도, 황해도, 평안남도 등에 간척지 조성이 아주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고려 천추태후 목종의 어머니이자 태조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 그녀는 고려 초 여성으로서 유래 없이 천하를 호령했던 독보적인 인물입니다.

그래도 후대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남자에게 빠져 권력을 탐한 음탕한 여자라는 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녀가 ‘고려를 대표하는 여성 정치인’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고려시대 최초의 귀족인 문벌귀족들의 도자기, 비색청자는 처음에는 참선을 돕고 지혜를 얻기 위해 마시던 최초의 잔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점차 다양하고 화려한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화려할수록, 품격이 높을수록, 학문이 깊고 높을수록 귀족문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비색청자가 권력다툼 속에서 더욱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은 누구나 이런 상징에 몰두했기 때문이에요.

고려 목조 불상의 첫 불상은 석가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숭상하던 밤사국의 우전왕이 향나무로 만들었답니다.

불교의 목공예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 조선 전기 조선 7대 세조 – 수양대군은 조선 6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또한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인 1453년에는 계유정란을 일으켜 실질적인 조선의 권력을 차지하였습니다.

결국 단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는 형태로 왕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단종 복위사건이 일어나 단종을 귀양 보내고 사육신 처형, 이시애의 난을 촉발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조선경국대전 ‘경국대전’에는 총 319개의 법조문이 이전·호전·예전·형전·병전·공전의 6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국대전』이 육전 체제로 된 것은 나라의 중앙, 지방의 정치 구조와 행정 조직의 6조 체제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삼강행실도 삼강이 강조된 조선시대에도 심각한 패륜범죄 사회문제였다고 합니다.

세종은 패륜범죄를 엄벌하기에 앞서 효도 풍습을 담은 책을 배포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 서적은 삼강행실도입니다.

세종: 봄에는 한글, 가을에는 공법에 시달린다”한글의 창시자로 알려진 세종대왕, 1444년 그 봄에는 훈민정음, 가을에는 공법의 문제로 고민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토지세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공법이 탄생하게 된 거죠. 공법은 토질의 전분 6등법과 풍흉의 연분 9등법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천문 관측인 한국의 역사를 보면 삼국시대부터 천문학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백제에서는 역법계산을 담당했던 달력박사가 있었고, 통일신라에는 천문박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고려시대에는 사천대, 사천감, 태사국 등의 천문관측을 담당했던 관청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관상감에 근무하던 천문학자들은 조에 편생해 낮과 밤에 교대 근무를 하면서 천문과 기상을 관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작성한 관측일지는 국왕, 황태자, 정승, 승정원 등에 제출되었습니다.

또한 매 6개월마다 관측일지를 베껴서 <천변초출기> 또는 <천변초출기> 라는 자료집이 편찬되었고, 그 해의 주요 천문현상은 따로 베껴서 현상별로 <천변등록>을 작성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기혼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신분에 따라 달랐습니다.

양반을 중심으로 한 상류층의 기혼여성은 성 뒤에 ‘씨’라는 호칭을, 평민층은 ‘소사’, 향리와 중인을 비롯한 중산층을 ‘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초기의 과거제도는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전체의 40~50%에 달할 정도로 힘없고 약한 사람들에게 ‘출세의 사다리’였습니다.

훈구 vs 사림조선은 16세기 사림의 정체진출로 학파가 정파로 전환되고 붕당이 형성되던 시기였습니다.

영남학파가 동인으로 기호학파가 서인으로 전환되면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립되어 남, 북인의 삼당체제로 바뀌었습니다.

기존 훈구파는 여전히 정치 집단으로 존재했지만 사림을 중심으로 정치권은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입니다.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정유재란, 유라시아 동부를 지배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여름 사망하자 전쟁을 계속할 명분을 잃은 일본군은 열도로 돌아왔습니다.

병자호란과 백전대첩 당대 최강의 철기병으로 무장한 청나라군에 가까스로 맞섰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47일 만에 종료된 전투병자호란, 문신인 평안감사 홍명보구와 무신인 평안군 유림 사이에 끊임없는 이견이 있어 진을 평지(홍명구)와 고지(유림)로 나누어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버텨서 승리로 귀결된 백전대첩은 병자호란의 치욕으로부터 조선의 체면을 지켜준 사건입니다.

자격루-물시계 세종 16년(1434) 장영실, 금조, 이천 등은 자격루를 제작하였으나 종전과는 달리 정확한 시간과 오차가 적어 정교한 물시계로 인정받았습니다.

자격루는 경화루 남쪽 보루각에 설치되어서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번 울리게 되어 있습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574년에 세워졌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비들이 서원에 모여 퇴계의 학문을 연마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걸작 몽유도원도 역시 한국 회화 사상 최고 걸작으로 평가될 뿐만 아니라 조선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술 작품으로 평가받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에 그리던 도원도의 모습을 15세기 중반인 1447년 당대 조선 최고의 화가 안견이 3일 만에 그린 그림입니다

조선시대 – 조선 후기 조선 19대 숙종의 ‘환국’, ‘정치적 국면 전환’이라는 뜻의 환국은 당파 교체와 정책 변화, 주요 인물 처분 등을 수반했습니다.

정조와 다산 정약용 정조는 즉위한 지 2년여 만에 민생, 인사, 군사, 재정 등 4개 분야의 개혁을 추진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법령을 정비하는 데에는 신중한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어중간한 정비보다 법령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삼정(三政) 문란=삼정(三政) 문란이란 조선 후기 재정의 근간을 이뤘던 전정(前庭)·군정(軍政)·환정(環政)이 부정부패에 연루됐음을 말합니다.

전정은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의 세금을 말하며, 군정은 군포를 내어 복무를 대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환정은 보릿고개에 관청에서 쌀을 빌렸다가 가을에 돌려받는 빈민 구제책입니다.

영조의 세제개혁 영조는 1년에 백성들이 부담하는 군필 2필을 1필에 납부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일종의 반값 군포법이었죠. 이 반액군포법은 바로 균역법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전체가 고르게 국역을 책임지자는 뜻입니다.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란 조선후기 17~19세기 초까지 일본에 파견된 사신으로 문화사절단을 말합니다.

1607~1811년까지 총 12차례의 일본사행이 이루어졌습니다.

참여한 인원은 평균 470명 정도이고, 기간은 1년 정도 걸렸습니다.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 국왕과 막부 장군은 각각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 현안을 해결하고

고려시대 개구리의 리더십인 광종 태조가 건국 과정에서 각 지방 호족의 딸들과 정략결혼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태조 사후 고려는 호족들 간의 치열한 왕위 계승전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중 두 형이 요절한 탓에 왕좌에서 멀었던 태조의 셋째 아들이 고려 제4대 왕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지방의 호족중심이었던 고려를 강력한 왕권국가로 만들고 정치 경제 개혁으로 500년간 고려의 초석을 다진 광종입니다.

서희의강동6주,한국외교사상가장극적인협상은거란의80만대군과대결하여한번의싸움없이압록강동쪽으로강동6주를되찾은고려영웅서희의훌륭한담판이었습니다.

최충헌과 교정도감 최충헌은 권력을 잡으면서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중국이 그동안 최고의 권력기구였으나 교정도감이 대신하여 국가의 여러 가지 중요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반대세력을 누르고 멋대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던 그는 경제적으로 넓은 영토를, 군사적으로도 도방과 삼별초를 군사처럼 거느렸습니다.

농민의 땅을 함부로 빼앗고, 문벌귀족들의 땅을 차지하여 자신들의 농장으로 만들고, 이렇게 백성들을 거세게 빼앗아 무신정변 이전보다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농민과 천민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민중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요동정벌군제 개혁안이야말로 정도전이 부르짖던 요동정벌을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정도전의 요동정벌 의지는 확고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379년(태조 6년) 정도전은 측근인 남남과 결탁하여 태조왕에게 결연히 뜻을 밝혔습니다.

이방원의 참모가 된 ‘고려 충신’ 하륜하륜은 정도전과 같은 팔방미인 스타일, 즉 르네상스형 참모였습니다.

정통학자로 볼 때 그들은 쓸데없는 학문까지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문학, 역사, 철학 외에도 도시공학, 군사학, 법률 등에도 관심이 있었고, 하륜은 문, 사, 철 이외에도 관상학, 풍수학 등에도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고려시대의 전시과제도 고려시대의 전시과라고 하는 토지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어 관리들에게 토지를 지급할 수 없게 되자 일시적으로 관리의 생계를 위해 녹과전을 지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미봉책으로 관료들이 권력을 잡은 토지를 독점적으로 폐해를 막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 재정은 날로 고갈되고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충신인 정몽주 선생은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왔을 당시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소화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지만 명나라와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외교인이기도 합니다.

친명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시해된 후 친원파가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자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으로 양국의 신뢰를 회복하자”고 주장하여 전란의 위기를 해소하였습니다.

한국의 지도를 바꾼 간척지 농경을 위한 간척의 시작은 고려 고종 35년(1248년) 몽고병란 때 식량 조달을 위해 청천강 하구에 제방을 축조한 것이 처음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강화도, 황해도, 평안남도 등에 간척지 조성이 아주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고려 천추태후 목종의 어머니이자 태조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 그녀는 고려 초 여성으로서 유래 없이 천하를 호령했던 독보적인 인물입니다.

그래도 후대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남자에게 빠져 권력을 탐한 음탕한 여자라는 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녀가 ‘고려를 대표하는 여성 정치인’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고려시대 최초의 귀족인 문벌귀족들의 도자기, 비색청자는 처음에는 참선을 돕고 지혜를 얻기 위해 마시던 최초의 잔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점차 다양하고 화려한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화려할수록, 품격이 높을수록, 학문이 깊고 높을수록 귀족문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비색청자가 권력다툼 속에서 더욱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은 누구나 이런 상징에 몰두했기 때문이에요.

고려 목조 불상의 첫 불상은 석가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숭상하던 밤사국의 우전왕이 향나무로 만들었답니다.

불교의 목공예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 조선 전기 조선 7대 세조 – 수양대군은 조선 6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또한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인 1453년에는 계유정란을 일으켜 실질적인 조선의 권력을 차지하였습니다.

결국 단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는 형태로 왕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단종 복위사건이 일어나 단종을 귀양 보내고 사육신 처형, 이시애의 난을 촉발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조선경국대전 ‘경국대전’에는 총 319개의 법조문이 이전·호전·예전·형전·병전·공전의 6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국대전』이 육전 체제로 된 것은 나라의 중앙, 지방의 정치 구조와 행정 조직의 6조 체제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삼강행실도 삼강이 강조된 조선시대에도 심각한 패륜범죄 사회문제였다고 합니다.

세종은 패륜범죄를 엄벌하기에 앞서 효도 풍습을 담은 책을 배포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 서적은 삼강행실도입니다.

세종: 봄에는 한글, 가을에는 공법에 시달린다”한글의 창시자로 알려진 세종대왕, 1444년 그 봄에는 훈민정음, 가을에는 공법의 문제로 고민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토지세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공법이 탄생하게 된 거죠. 공법은 토질의 전분 6등법과 풍흉의 연분 9등법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천문 관측인 한국의 역사를 보면 삼국시대부터 천문학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백제에서는 역법계산을 담당했던 달력박사가 있었고, 통일신라에는 천문박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고려시대에는 사천대, 사천감, 태사국 등의 천문관측을 담당했던 관청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관상감에 근무하던 천문학자들은 조에 편생해 낮과 밤에 교대 근무를 하면서 천문과 기상을 관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작성한 관측일지는 국왕, 황태자, 정승, 승정원 등에 제출되었습니다.

또한 매 6개월마다 관측일지를 베껴서 <천변초출기> 또는 <천변초출기> 라는 자료집이 편찬되었고, 그 해의 주요 천문현상은 따로 베껴서 현상별로 <천변등록>을 작성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기혼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신분에 따라 달랐습니다.

양반을 중심으로 한 상류층의 기혼여성은 성 뒤에 ‘씨’라는 호칭을, 평민층은 ‘소사’, 향리와 중인을 비롯한 중산층을 ‘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초기의 과거제도는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전체의 40~50%에 달할 정도로 힘없고 약한 사람들에게 ‘출세의 사다리’였습니다.

훈구 vs 사림조선은 16세기 사림의 정체진출로 학파가 정파로 전환되고 붕당이 형성되던 시기였습니다.

영남학파가 동인으로 기호학파가 서인으로 전환되면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립되어 남, 북인의 삼당체제로 바뀌었습니다.

기존 훈구파는 여전히 정치 집단으로 존재했지만 사림을 중심으로 정치권은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입니다.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정유재란, 유라시아 동부를 지배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여름 사망하자 전쟁을 계속할 명분을 잃은 일본군은 열도로 돌아왔습니다.

병자호란과 백전대첩 당대 최강의 철기병으로 무장한 청나라군에 가까스로 맞섰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47일 만에 종료된 전투병자호란, 문신인 평안감사 홍명보구와 무신인 평안군 유림 사이에 끊임없는 이견이 있어 진을 평지(홍명구)와 고지(유림)로 나누어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버텨서 승리로 귀결된 백전대첩은 병자호란의 치욕으로부터 조선의 체면을 지켜준 사건입니다.

자격루-물시계 세종 16년(1434) 장영실, 금조, 이천 등은 자격루를 제작하였으나 종전과는 달리 정확한 시간과 오차가 적어 정교한 물시계로 인정받았습니다.

자격루는 경화루 남쪽 보루각에 설치되어서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번 울리게 되어 있습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574년에 세워졌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비들이 서원에 모여 퇴계의 학문을 연마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걸작 몽유도원도 역시 한국 회화 사상 최고 걸작으로 평가될 뿐만 아니라 조선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술 작품으로 평가받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에 그리던 도원도의 모습을 15세기 중반인 1447년 당대 조선 최고의 화가 안견이 3일 만에 그린 그림입니다

조선시대 – 조선 후기 조선 19대 숙종의 ‘환국’, ‘정치적 국면 전환’이라는 뜻의 환국은 당파 교체와 정책 변화, 주요 인물 처분 등을 수반했습니다.

정조와 다산 정약용 정조는 즉위한 지 2년여 만에 민생, 인사, 군사, 재정 등 4개 분야의 개혁을 추진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법령을 정비하는 데에는 신중한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어중간한 정비보다 법령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삼정(三政) 문란=삼정(三政) 문란이란 조선 후기 재정의 근간을 이뤘던 전정(前庭)·군정(軍政)·환정(環政)이 부정부패에 연루됐음을 말합니다.

전정은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의 세금을 말하며, 군정은 군포를 내어 복무를 대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환정은 보릿고개에 관청에서 쌀을 빌렸다가 가을에 돌려받는 빈민 구제책입니다.

영조의 세제개혁 영조는 1년에 백성들이 부담하는 군필 2필을 1필에 납부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일종의 반값 군포법이었죠. 이 반액군포법은 바로 균역법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전체가 고르게 국역을 책임지자는 뜻입니다.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란 조선후기 17~19세기 초까지 일본에 파견된 사신으로 문화사절단을 말합니다.

1607~1811년까지 총 12차례의 일본사행이 이루어졌습니다.

참여한 인원은 평균 470명 정도이고, 기간은 1년 정도 걸렸습니다.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 국왕과 막부 장군은 각각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 현안을 해결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