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도원동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4 15:31:28
(뿌리를 찾고) 중구 도원동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은 조선후기 다솜면 장천리와 독각리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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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리는 우리말로 장사래마을이며, 이 일대를 흐르던 개울이 길다.
(도서 페이지)
선(얻다)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에도 독각교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독각리,
(하나의 긴 보드로 연결된 다리)한국어 단어 의미 (옆다리)나온 이론
독이 있는 교각을 세운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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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리와 독각리는 지금의 숭의동 일대에 있어 다리를 건너야 한다.
개통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 개울이 덮여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1906년도산리는 1998년 이 두 곳의 일부를 철거해 다시 조성됐으며 해방 후 도원동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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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도 도원도 이곳이 복숭아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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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동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후에도 도심의 변두리였기 때문에
감염환자 격리·치료하는 병원 (덕생원)그리고 화장터가 있었다.
도원동 야구장 1920년19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야구의 본고장 인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 제물포고의 위치 (어터골) 분지의 공공 놀이터 건설,
이 운동장이 만들어지자 인천에 있던 배재학교가 서울로 이전했다.
, 중앙고등학교 등을 다녔다.
(경인철도 장학생 장학금)야구팀 (한용단)만들어진.
한용단에는 유명한 선수들이 많아서 거의 항상 일본팀을 꺾고 억눌린 민족의식을 되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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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당시 서민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오늘날의 프로야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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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야구의 기원은 한용단이다.
1934년1998년 웃터골공설운동장이 도원동으로 이전된 후에도 여전히 활기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인천고와 동산고 야구단은 한동안 전국체전과 청룡기 대회를 번갈아 가며 저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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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용 기자 ) 조선일보